요한복음 1장 : 9-1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John 1: 9-10
9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 man was coming into the world.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ough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the world did not recogniz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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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 9-1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9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 man was coming into the world.
‘참 빛’ (The true light )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그는 참 빛이시다’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 입니다. 이 ‘참’ [알레디논]은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참’ [알레디논]은 ‘거짓에 반대되는 참’ [알레데스]가 아닙니다.
‘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 엡 5:8)에게, 참된 주님이 되심을 나타냅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계 21:*-27)
‘세상에 와서’
‘세상’ [코스모스]는 질서와 연관된 용어입니다. [코스모스]는 ‘각 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코스모이]의 질서와 조화로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코스모이’ 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기준을 바로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런 개념과 다릅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했음에도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코스모스’의 정의는 이것 입니다.
(1)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 (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 (롬 1:20).
(2)인간 역사의 현장, 인류가 살아가는 장소인 ‘지구’ (롬 1:8).
(3)타락한 ‘인류’ (1:29)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부패된 공간,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을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각 사람은 인류나 어느 집단과는 무관한 개념입니다.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각각 개별의 존재를 말합니다.
그들 개개인 각자에게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인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구약시대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코스모스]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 중생 (born again)을 통해서 각 개개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도들 하나 하나 모두 귀한 형제 자매입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ough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the world did not recognize him.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1절에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미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본절에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생애기간을 보여줍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의 창조주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죄악에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보이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고 (마 13:55), 귀신들린 자 (마 12:2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알지’ [에그노] 라는 단어는 ‘알다’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입니다. 후천적인, 객관적인 관찰로 대상(사물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제)을 파악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5과 구약(창 4:1, 민 31:17)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는 인간이 긴밀한 상호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앎’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요한 복음과 요한 일서에서 이 용어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과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 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예수와 성도의 관계도 ‘앎’입니다. 성부와 성자를 아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런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됩니다. (요일 4:7-12)
‘알지 못함’은 ‘미움, 다툼’ 으로, ‘앎’은 사랑과 ‘영원한 생명’ ‘영생’으로 결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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