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장: 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Romans 10: 14-15
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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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14-15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를 믿는 자입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 입니다.
‘어찌 부르리요’ 라고 번역된 헬라어 [포스 에피칼레손 타이]는 ‘기도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는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의 3인칭 복수 부정 과거 중간태 로서 가정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라고 바울이 말하는데, 두번째 믿음의 걸음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에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어찌’ , 어떻게 [포스]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을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인간이 복음을 받아 들이든지, 거부하려고 해도, 먼저 복음에 대해 알아야 되니, 일단 먼저 그 복음에 대해 들어야 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복음을 전수받기 위해 메시지를 ‘듣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도 했으나 문자로 전해질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려면 성경의 기록이 갖추어질 때 까지 오로지 말로서 전파되어야 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세번째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이 중요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의 은혜를 증언하게 함으로,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전파자’로 번역된 헬라어 [케뤽소]는 (전파하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로서, 현재 능동태분사입니다. ‘전파자’ 앞에는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직책이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를 의미합니다. [케뤽소]는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를 말하고, 전령은 왕이 명령한 것 이외에 다른 말을 가감할 수 없고 다만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사용했습니다.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어떤 전도자가 복음 을 전한 것은 이미 그전에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데 있습니다. ‘보내심’ 이라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은 [아포스텔로 : 보내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입니다. ‘사도’ [아포스톨로스]는 이 동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두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첫째, 인간은 그보다 더 높으신 권위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둘째,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도 보내심 받았고 예수님도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요 3:34, 7:16).
이는 또한 믿음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됩니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안에 그가 세우신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를 예수의 복음 전파자로 보았고 열방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열방이 듣고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고 이사야 52:7을 인용합니다. 황페된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서 바울은 자신의 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깝다는 이 기쁨과 평화의 선포를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귀화하게 될거라는 이 메시지가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큰 기쁨이었으나, 오늘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이 복음의 메시지는 더 크고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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