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11-13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 Corinthians 13: 11-13
11 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12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13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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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 11-13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 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9절에 언급된 ‘부분적’ 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이거나 사색적인 것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들은 감각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현세의 삶에서 가지는 지식 수준과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에 객관적으로 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있고 주관적 지각보다는 객관적 지식이 아이들보다는 많습니다. 이는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따르는 것입니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적 자세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하는 지식을 실체화하고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와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매우 주관적이고 감각적입니다. 과학적 지식도 , 감각주의에 속합니다. 세상은 세상과 역사를 상대적 가치에 의해 평가합니다. 과학이 모든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인간의 마음이 통솔되고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그 현재의 상태 만을 알고 미래를 준비할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고통은 느끼나 장래의 고통을 피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줄 모릅니다.
어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 여기고 무엇이 진정 두려워할 일인지 모르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2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예전의 거울은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이 말씀의 비유는, 존재는 하지만, 그 정체를 전적으로 알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해 내세를 깨달으나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라고 했습니다 (약 1:23,24).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 건망증이 심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힘써야 됩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 하여야 될 것입니다 (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캄캄할 때 더욱 빛을 사모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 이니라 “ (고후 3”18)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믿음, 소망, 사랑은 왜 늘 함께 있는 것일 까요?
(1)소망을 갖지 않은 믿음은, 장래의 은덕을 바라보지 않으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여 믿으면 자유도 잃고 진정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는 믿음은 , 인생 최고의 신앙이며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는 믿음입니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갖지 못하는 믿음은, 생명없는 사물이나, 이치를 믿는 것같은 것입니다. 생명 없는 물건은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1+1= 2라는 셈법의 이치를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 입니다 (히 11:6).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한 참 믿음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을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실 때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신앙입니다
(2)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경이 말해주시는 믿음은,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로 생긴 믿음은 사랑을 동반해야 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견고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라 (요일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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