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Matthew 11:1-5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1 After Jesus had finished instructing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n from there to teach and preach in the towns of Galilee.
예수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처의 성읍들을 찾아다니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친후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을 예수님께 보고 합니다. (막 6:30)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모여든 수많은 군중에게 사적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한 것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의 중요 임무는, 신자를 교육 시키는 것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2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Christ was doing, he sent his disciples
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한 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과 비난을 받자 분노해 세례요한을 투옥했습니다. (14:3,4) 세례 요한은 1년 정도 사해 동쪽 마카이루스 성에 감금 되었다가,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뒤에 오시는 메시야의 길을 닦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의 제자 2명을 보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죽을 때 까지 충성을 다했었고 요한 사후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공동체 를 형성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신지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3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메시야가 오심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창 49:10, 사 9:1-6, 11:1-5 단 9:24-27) 그래서 ‘오실 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눅 7:21)
‘당신 이오니이까’ 는 당신이 오실 그분이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요한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요한이 왜 갑자기 이즈음에, 이런 의심을 했을 까 하는 데는 원인이 있습니다.
1)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조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메시야로 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민족적인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전혀 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이 선포했었던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 했으나 예수님은 심판보다, 사랑의 사역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말 4 ;5, 요 1:19-21).
3) 예수님이 진정으로 오실 메시야 라면 메시야라는 어떤 표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으니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4 Jesus replied,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
예수님의 답변은 간결합니다. 오직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사 29:18,19,35:5,6 )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 (누가 7:21) 요한의 제자들이 많은 기적이 행해지고 있을 때 찾아왔고, 그들이 듣고 본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감되어 있는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주십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하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메시야의 신분을 밝힐수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보아,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수 있게 하십니다.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5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
이 여섯개의 표적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내용입니다. (사 29:18, 35:5, 42:7, 61:1)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통치할 새세계에서는 모든 질병과 환난, 가난함, 애통함, 죽음 까지도 없어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외경 에녹서 25:5, 제4에스라서 8:52)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기대와 구약을 근거로 당신의 메시야직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차례 ‘죽은 자가 살아나며’ 에 해당되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9:18, 눅 7:11-15) 이것은 메시야의 사역중 가장 탁월한 징표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아름다운 소식’ (사 61:1)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에게 , 고통 받는 자들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소식입니다.
—------------------------------------------------------
마태복음
Matthew 11:6-14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 이 있도다 하시니라
6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 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혹은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한 모양을 하시고 유대인의 기대와는 다른 형태의 메시야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부했고, 예수께서 보이신 메시야의 참된 모습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 대해 주의를 주고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치 말도록 당부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제한된 사고와 한정된 인식만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온전히 이해 하기 힘들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이해가 닿지 않는 세계에 대해 실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나 왕같은 모습이 아니라, 약하고 볼품 없는 모습이셨고 예수님은 유대인 선민의식을 버리고 이방인까지 품으려고 하셨습니다. 이런 행적과 그의 말씀을 믿으며, 그를 메시야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행복한 자 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됩니다. 진리와 생존의 근거가 됩니다. (요 20:31)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7 As John's disciples were leaving,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desert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 갔을때,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 때문에 세례요한의 권위가 손상된 것을 회복시키려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참된 사명에 대하여 무리에게 가르칩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이한 그의 외양과 가르침에 감동 받았습니다. (3:1-12) 그들 중 일부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요한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관심은 충동적이었고 영적 깊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을 신적 권위를 지닌 선생님으로 인정했으나 그가 안내하는 메시야에 대한 불신앙을 없애려 하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오늘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것을 믿고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너희가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오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언하였고(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이 증언한 것에 충실했던 자입니다.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8 no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fine clothes? No, those who wear fine clothes are in kings' palaces.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입던 가벼운 장식용 의류입니다. 올이 가는 린넨실로 짜여진 고가품입니다.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차림이었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좋은 옷이나 외모를 보러 광애에 간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왕궁에 사는 부귀와 영화의 인물이 아닙니다. 요한은 천한 생활을 하며 고난을 겪었지만 높은 도덕성을 가진 선지자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9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그 당시 유대인은 말라기 이후 하늘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선지자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세가지 질문 (7.8.9절)을 던지시고 또 스스로 답변하십니다. 10, 11절의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 문답식 강론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임무를 맡은 자입니다. (말 3:1) 이사야는 메시야께서 오실 것이라는 예언한 탁원한 예언서를 남긴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메시야 시대에 살면서, 그가 오심을 분명히 선포하고 직접 메시야를 소개한 이사야보다도 훌륭한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0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이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말라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땅에 임할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습니다. (사 9:6)
에수님은 세례 요한이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자 엘리야이며 (말 4:5,6, 눅 1:76),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선구자 이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백성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할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도구 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 I tell you the truth: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아무리 작은 자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하고 증거한 자들, 천국의 실패를 경험한 자들,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요한 보다 더 큰자라고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도 탁월한자 입니다. 이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천국에서 요한과 그리스도의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때, 모든 이들이 요한처럼 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이시점 부터 천국의 확장은 계속됩니다. 천국은 역동적인 많은 사람에 의해 열려졌고 열정적인 신앙인들에 의해 침노 당할것입니다. 세례요한 때 부터 하늘 나라는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용기 있는 자, 강한 집녑을 가진자들은 천국을 소유하려고 할것입니다.소심하고 쉽게 낙심하는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을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애쓰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와 평화 기쁨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좌와 악한 자와는 단절해야 됩니다. 마치 전쟁을 하듯이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순수한 열정으로 천국을 얻고자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됩니다.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3 For all the Prophets and the Law prophesied until John.
구약에서 예언했던 내용은 세례 요한으로 마감되었습니다. 구약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4 An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he is the Elijah who was to come.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전에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고 그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 3:1,4:1,5) 예수님은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 임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
마태복음Matthew 11:15-19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이는 단순히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적 진리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을 가지고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이를 경시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며, 진리가 전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는 복된 사람입니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6 'To what can I compare this generation? They are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s and calling out to others:
‘이 세대’는 요한과 그리스도가 살던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부인하고 그로인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까지 몰고 간, 들을 귀가 없는 자들 입니다.
‘무엇으로 비유할까’ 예수님은 영적인 지혜를 일상생활의 사건과 비교해 설명함으로, 무지한 백성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놀이 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시며, 그것을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해 말하셨습니다.
’장터’에 해당하는 원어 [아고라] 는 원래 ‘회합’을 의미하나, 점차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 보다는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 장소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물론 상거래도 이루어지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아이들이 의견 일치를 못하고, 각자 자신의 심정대로 하니 어떤 놀이를 할지 결정을 못하는 상황을 보셨습니다. (눅 7:31-35)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7 "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mourn.'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는 아이들이 어른들 처럼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르고 친구에게는 춤을 추라고 했는데, 그 친구들이 춤추지 않고 그냥 서있기만 하고 놀지 않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는 곡하고 가슴을 치는 장례식 풍습으로 놀이를 바꾸었습니다. 슬피울어도 상대편 친구들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치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권유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무관심과 의견의 불일치를 나타냅니다. 친구의 놀이 제안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어느 하나의 감정이라도 택해야 되는데,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부른 친구들이 아무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요한이 회개하고 애통하라고 해도 아무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무감각했습니다. 이 세대가 요한과 예수님을 무시한 것을 친구와 함께 놀지 못하는 아이들의 놀이상황 에다 비유한 것 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아무런 기쁨이 없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회개하는 눈물이 없습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8 For John came neither eating nor drinking, and they say, 'He has a demon.'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이었습니다.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눅 1:15, 7:33) 그는 금욕적인 절제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메세지를 듣고 회개하지 않고 무반응으로 지내다가, 오히려 그를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9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they say, 'Here is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 But wisdom is proved right by her actions."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이 말속에는 자신이 고난 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라는 (단 7:13)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눅 5:24)
‘먹고 마시매’ 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처럼 금욕 생활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합니다.
‘먹기를 탐하고’는 요한에게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식탐하는 대식가로 비난하며 말한 것입니다. 이들은 메시지에 관심 없고 오직 악의로 비난거리 만 찾는 자들 입니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라고 예수님을 술꾼 취급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실인이 아니었으니 일반인들 처럼, 일상적인 식사를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식사때 누구나 마시는 포도주를 관습대로 마셨을 뿐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시고 죄인의 친구, 죄인과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라고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악한자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이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이 구절을 누가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눅 7:35)로 기록했습니다.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 되어 표현됩니다. (욥 28. 잠 1:8) 이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밤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님은 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결국 옳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Matthew 11:20-24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0 Then Jesus began to denounce the cities in which most of his miracles had been performed, because they did not repent.
‘권능’[뒤나미스]는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권능은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기적’ ‘초자연적 행위와 사건’을 나타낸 말입니다.
‘고을’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 성읍 전체를 말합니다.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유무에 따라 결정된다고 히브리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창 18:22) 예수님은 메시야이신 신적인 기적들을 도시에서 행했음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때에’는 70인 전도 파송 을 하고 난 다음에 , 요한의 제자들이 왔다간 다음으로 추정됩니다.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1 'Woe to you, Korazin! Woe to you, Bethsaida!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서쪽에 있던 도시로 추정됩니다.선교의 중심지 였던 가버나움과 멀지 않는 곳이라서 고라신과 벳새다의 선교를 위해 예수님께서 많은 시간을 할애 하셨을 것입니다.
‘벳새다’는 ‘사냥집’ 이라는 의미입니다. 갈릴리 호수강둑에 있던 도시로 안드레,빌립 ,베드로의 고향(요 1:44)이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장소로보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입니다. 바알 우상 숭배지역 이였던 이 도시의 심판에 대해 구약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시 23, 겔26-28)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두로왕에게서 공급 받을 만큼, 문물이 발전한곳입니다. (대하 2:11-16)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에 속했으나 한번도 점령해보지 못합니다. (수 19:28) 이 두도시는 무역과 항해가 발달하여 부와 향락을 누렸고,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베옷’은 막타의 짧은 털로 짠 올이 거친 직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슬픔을 당하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 위에 이 옷을 입었습니다. (삼하 3:31, 왕상 21;27)
‘재에 앉아’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재를 머리에 뿌리거나 (삼하 13:19, 애 2:10)그 위에 눕거나 (에 4:3) 앉거나 그 위를 구르기 까지 했습니다. (렘 6:26, 미 1:10) 이는 회개와 비통함의 표시입니다.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2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이스라엘의 도시들에게 기적과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셨는데, 이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로 타락한 두로와 시돈에게 이를 베풀었다면 그들을 회개했을 거라고 말하실 정도로, 고라신과 벳새다의 부패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3 And you, Capernaum, will you be lifted up to the skies? No, you will go down to the depths.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Sodom, it would have remained to this day.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활동하신 주된 도시로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4:13) 그럼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이제 교만한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이 도시들이 받게 될 것입니다. 추후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이 두도시는 거의 초토화 됩니다.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4 But I tell you that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Sodom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소돔’은 악한 죄때문에 심판 받아 멸망한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보이신 기적과 권능을 그곳에 행했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했을 것이라는 말은 가버나움이 얼마나 심히 부패하였나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특별히 많은 기적과 권능의 혜택을 받고도 회개치 않으니 심판 앞에 온전치 못할것입니다.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견책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말씀의 은혜 안에 살고 있고, 문명의 발달과 의료의 발달을 허락 받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영적 기적을 직접 체험하는 특혜를 누린 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책무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더욱 겸손해야 되고 자신의 매일을 말씀으로 되돌아 봐야되는 이유입니다.
—-----------------------------------------
마태복음Matthew 11:25-27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5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그 때에’는 시간적인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문맥의 접속사로 사용했습니다. 20-24절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내용이었고, 25절 -30절은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신 자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 분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시 144:6, 사 42:5,행 17:24)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격적 일체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요 11:41, 17:1)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기적과 권능을 보고도 여전히 교만 한 자들 입니다. 이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16절의 이 세대들과, 20-24절의 이 도시의 주민을 말합니다. 자기 아집과 편견, 이성적 판단으로 예수와 그의 나라를 깨닫지 못합니다.이들에게는 ‘숨기시고’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영적 진리를 이해 하려면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적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린아이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을 말합니다. (시 19:7, 119:130)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의 가르침을 기뻐하는 사람들 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스스로 만족해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오직 하나님 의 도움만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런 초월적 경륜에 대해 동의하고 지지하며, 이렇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6 Yes, Father, for this was your good pleasure.
‘이렇게 된 것’은 25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독특한 계시 전달 방법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입니다. (삿 13:23) 이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완전히 일치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옳다고 말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기에 가능합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7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의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성자의 권위를 주장하십니다 (28:13, 요 13:3)
‘ 모든 것’은 성부께서 위임하신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 모든 인류를 통괄할 권위,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된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위탁과 위임,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모든 것,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등이 이 모든 것에 포함됩니다.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결국 이는 예수님의 역사적 선재성, ‘이미 존재하심’을 증거해 줍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 규정하시고,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하십니다.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는 단순한 지적인 인식을 훨씬 넘어서는 지식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상태의 지식,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 할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전 2:10)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 (서로를 앎)은 완전한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계시가 전달 되지 않는 한,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없습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 대로’ 여기서 ‘소원대로’는 강하게 어떤 것을 의지적으로 소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성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수 있으시고, 또 계시하시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것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성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 요 (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 1:14, 18) 또한, 말씀 그 자체 이십니다. (요 1:1) 하나님은 예수님과 부자지간 이시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시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
마태복음Matthew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수고하고’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는 원어에 현재분사 수동형으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채 계속해서 지쳐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와 염려, 고통, 육체적 의무 외에도 전통적으로 부과된 율법과 과거로부터 유전되어온 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습니다.(23:1-4)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시면서, 동시에 죄인들을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초대한 사람들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아이처럼 지혜가 없고, 순박하니 초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 말씀은 마지막 날의 안식만을 의미하지않습니다. 일상 생활의 모든 갈등을 해소시킨 뒤,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하실것입니다. 믿는 자가 주께로 가면, 그는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특히 ‘내가’ [카고]라는 말이 강조됩니다.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비교할 때, 예수님의 초청은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이는 예언의 성취를 나타니고자 예수님의 겸허하심과 비천하신모습을 구약의 예언대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미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하게 고난 받는 종이라고 묘사했습니다.(사 42:2, 63, 53:1-2)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합니다. (슥9:9)
본 절에서 말하는 ‘마음’[카르디아]은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기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 인격의 거처로서의 심장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은 본질적인 예수님의 성품을 언급한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단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servant)로서 타인을 섬기고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잘 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는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훈육관계를 가리킬때 관용적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멍에는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짐승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고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사람이 함께 메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멍에를 항상 함께 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메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주는 세상과 율법의 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롭고 가벼운 멍에를 져야됩니다.
‘내게 배우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모방하고,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 만이 전달해 줄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마음이’ 에서 ‘마음[프쉬케]는 예수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생명, 혹은 생명의 혼(soul)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아(自我), 자의지(自意志)라고 할수 있습니다.
‘쉼을 얻으리니’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기서 ‘얻으리니’ 라고 표현된 원어의 의미는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으니, 약속하신 그 안식을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입니다.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쉽고’ [크레스토스]는 ‘부드럽고’, ‘좋다’, ‘은혜스럽다’,’안락하다’ ‘친절하다’ 같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가장 가벼운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해서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했습니다.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짐인 그의 계명(Commandment df love)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요일 5:3) 예수님의 가르침이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의 가르침은 준엄하고 숭고하고 엄정합니다. 그렇지만, (1) 그 가르침은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고,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고, (3) 항상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메고 가는 멍에이기 때문에 가볍고, 영생을 동반하는 쉼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댓글